돈 심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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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돈 심프슨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며, 특히 제리 브룩하이머와 함께 '플래시댄스', '비벌리 힐스 캅', '탑건' 등의 흥행작을 제작했다. 그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마케팅 부사장과 사장을 역임했으나, 약물 사용으로 해고되었다. 이후 브룩하이머와 파트너십을 맺고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었지만, 과도한 약물 사용과 사생활 문제로 논란을 겪었다. 1996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마지막 작품인 '더 록'은 그를 기리기 위해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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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심프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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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도널드 클래런스 심프슨 |
출생일 | 1943년 10월 29일 |
출생지 |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
사망일 | 1996년 1월 19일 (향년 52세)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직업 | 영화 프로듀서 각본가 배우 |
활동 기간 | 1975년–1996년 |
학력 | 웨스트 앵커리지 고등학교 졸업 |
모교 | 오리건 대학교 (BS) |
주요 작품 | 플래시댄스 비버리 힐스 캅 탑건 더 록 |
2. 생애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성장했다. 오리건 대학교 졸업 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워너 브라더스를 거쳐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입사, 마케팅 담당 임원을 거쳐 제작 부문 사장까지 올랐으나 1982년 약물 문제로 해고되었다.[9][8][5]
해고 이후 동료 프로듀서 제리 브룩하이머와 손잡고 1980년대에 ''플래시댄스'', ''비벌리 힐스 캅'', ''탑건'' 등 연이은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성공시키며 당대 최고의 영화 제작자로 명성을 떨쳤다.[10][11] 이들의 성공은 파라마운트와의 특별 계약으로 이어졌으나, ''폭풍의 질주''의 성과를 둘러싼 갈등 끝에 결별하고 1991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이적했다.[14][15]
디즈니에서도 ''나쁜 녀석들'', ''더 록'' 등의 흥행작을 내놓았지만, 그의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약물 남용과 무절제하고 논란 많은 사생활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오랜 파트너였던 브룩하이머와의 결별로 이어졌다.[29]
1996년 1월 19일, 로스앤젤레스 벨에어 자택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31][32] 그의 삶과 죽음은 할리우드 성공 신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2. 1. 초기 생애
심슨은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주부인 준 헤이즐(결혼 전 성: 클라크)이었고, 아버지는 아들 출생 당시 보잉의 정비공이었던 러셀 J. 심슨이었다.[2] 그는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자랐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기에, 심슨은 일주일에 4~5번 교회에 다녔으며[3] 스스로를 "전 과목 A의 성경 학생"이라고 칭했다.[4]웨스트 앵커리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리건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유타에서 스키 강사로 일했고,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연극 광고 대행사에서 근무하며 제1회 국제 에로틱 영화제의 홍보를 담당하기도 했다.[5] 억압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진 그는, 영화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할리우드 영화사로 진출했다.
2. 2. 경력
미국워싱턴주시애틀에서 태어나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 영화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영화계 입문을 꿈꿨다. 오리건 대학교 졸업 후 할리우드로 진출했다.197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경력을 시작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 1972년 워너 브라더스에서 ''우드스톡'', ''시계태엽 오렌지'' 등의 마케팅 업무를 맡았다.[6] 1975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입사하여[7] 1977년 제작 부사장, 1981년 사장까지 올랐으나[8][5] 1982년 약물 문제로 해고되었다.[9]
해고 후 동료 프로듀서 제리 브룩하이머와 파트너십을 맺고[10][11] 1980년대에 ''플래시댄스''(1983), ''비벌리 힐스 캅''(1984), ''탑건''(1986), ''비벌리 힐스 캅 2''(1987) 등 연이은 흥행작을 내놓으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제작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 성공으로 1985년과 1988년에는 브룩하이머와 함께 전국 극장주 협회로부터 '올해의 프로듀서'로 선정되기도 했으며,[12] 성공적인 영화 사운드트랙 제작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1990년 파라마운트와 대규모 계약을 맺었으나 ''폭풍의 질주''의 성과를 둘러싼 갈등 끝에 결별하고,[14][15] 1991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이적했다.[14] 디즈니에서는 ''The Ref''(1994)의 실패 후 ''위험한 아이들'', ''크림슨 타이드'', ''나쁜 녀석들''(이상 1995) 등으로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14]
그러나 심화된 약물 문제와 화려하지만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사생활 끝에 브룩하이머와 결별했으며, 1996년 1월 자택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브룩하이머는 마지막 공동 제작 영화 ''더 록''(1996)을 심프슨에게 헌정했다.
2. 2. 1. 1970년대 ~ 1980년대: 파라마운트 픽처스
197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의 잭 워델 & 어소시에이츠에서 일하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6] 1972년에는 워너 브라더스에서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 마케팅 업무를 맡아 ''우드스톡''과 ''시계태엽 오렌지'' 같은 영화의 배급 마케팅을 담당했다.1975년, 친구인 스티브 티쉬(래리 티쉬의 조카이자 이후 ''리스키 비즈니스'', ''포레스트 검프'' 등을 제작)의 소개로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당시 스티브 티쉬가 거절했던 자리에 심프슨이 채용되었다. 이때 이미 친구였던 제리 브룩하이머는 심프슨에게 면접을 보러 갈 차를 빌려주었다.[7]
파라마운트 입사 후, 1976년 영화 ''캐논볼''의 각본을 공동으로 집필하고 작은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파라마운트의 제작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1981년에는 사장 자리에 올랐다.[8][5] 그는 1980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제리 브룩하이머와 함께 제작을 맡으며 본격적인 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982년, 스튜디오 회의 중 약물 사용으로 쓰러진 사건 이후 파라마운트에서 해고되었다.[9] 당시 그는 한 번에 8개의 작품을 진행하며 제작 과정에서 자주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8]
해고 직후, 심프슨은 동료 프로듀서 제리 브룩하이머와 공식적인 파트너십을 맺었다.[10][11] 두 사람은 1980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영화들을 연이어 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플래시댄스'' (1983), ''비벌리 힐스 캅'' (1984), ''탑건'' (1986), ''비벌리 힐스 캅 2'' (1987) 등이 있다. 특히 ''플래시댄스''의 큰 성공으로 심프슨과 브룩하이머는 파라마운트 픽처스 산하에 자신들의 제작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13]
이들의 영화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심프슨과 브룩하이머는 1985년과 1988년 두 차례에 걸쳐 전국 극장주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Theater Owners)로부터 '올해의 프로듀서'로 선정되었다.[12] 또한, 그들이 제작한 영화들은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상에 여러 차례 후보로 올랐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운드트랙 제작에도 힘을 쏟아, 조르지오 모로더, 케니 로긴스 등 당대 인기 뮤지션들을 기용하여 사운드트랙 앨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래미상 후보에도 여러 번 지명되었다.
2. 2. 2. 1990년대
1990년, 심슨과 제리 브룩하이머는 파라마운트와 5년간 3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이들이 제작하고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폭풍의 질주''가 개봉되었다. 이 자동차 경주 영화는 제작비 6000만달러로 전 세계에서 1.58억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재정적으로는 성공했지만, 평가는 엇갈렸고 이전 작품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심슨과 브룩하이머는 영화의 부진한 성과를 파라마운트가 기획과 개봉을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비판했고, 반대로 파라마운트는 두 사람의 과도한 제작비 지출을 문제 삼았다. 이러한 갈등 끝에 두 사람은 파라마운트와 결별했다.[14][15]1991년, 심슨과 브룩하이머는 파라마운트를 떠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었다.[14] 그러나 1990년대 초반에는 영화 제작 활동이 없었다. 디즈니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는 1994년에 개봉한 ''The Ref''였으나,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14]
이후 1995년에 ''위험한 아이들'', ''크림슨 타이드'', 그리고 컬럼비아 픽처스가 배급한 ''나쁜 녀석들''이 연이어 개봉하며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14] 1980년대와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도 사운드트랙에 당시 유행하던 힙합 뮤지션 등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히트시켰고, 그래미상 후보에도 여러 차례 올랐다.
하지만 심프슨의 마약 남용 문제는 점점 심각해졌고, 결국 오랜 파트너였던 브룩하이머는 그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 직후인 1996년 1월, 심프슨은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마약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그의 마지막 공동 제작 영화가 된 ''더 록''(1996)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영화를 돈 심프슨의 추억에 바칩니다"라는 헌정 문구가 삽입되었다.
2. 3. 사생활
심프슨은 결혼하지 않았다.[8] 1970년대에 그는 사이언톨로지 교회에 가입하기 위해 수업을 들었지만, 2.5만달러를 쓰고도 개인적인 개선을 거의 보지 못하여 그만두었다.[16][17] ''폭풍의 질주'' 촬영 중에는 더 비싼 사이언톨로지 특허 음성 녹음 장치 비용 지불을 거부한 뒤, 사이언톨로지 지도자 데이비드 미스캐비지를 제작 현장에서 내쫓기도 했다.[18]그는 거친 성격과 도발적인 발언, 그리고 의심스러운 주장으로 유명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대해 "똑똑한 유대인인데, 저렇게 하얀 빵처럼 밋밋하다니 놀랍다"라고 말했으며,[19] 나중에는 "데이비드 린치를 ''듄''의 감독으로 추천한 사람은 신체 모든 부분을 검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8] 제작자로서 "우리의 의무는 돈을 버는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20] 심프슨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제공한 특별 장비를 이용해 매일 운동했다.[21]
심프슨은 자신이 마이클 만을 발굴했고, 데브라 윙거의 경력을 시작시켰으며, 리처드 기어를 ''아메리칸 지골로''에 캐스팅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이클 아이즈너는 부인했지만, 자신이 ''비벌리 힐스 캅''의 컨셉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8] 영화 업계에서 심프슨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의 과장을 감안하기 위해 제프 카젠버그가 만든 "돈 심프슨 할인 계수"(DSDF)를 언급하곤 했다.[8] 로버트 알트만 감독에 따르면, 심프슨은 1979년 스튜디오 임원 회의에서 셸리 듀발을 ''뽀빠이''의 올리브 오일 역으로 캐스팅하는 것에 반대하며 "글쎄, 나는 그녀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녀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면, 그녀는 영화에 출연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2]
영화의 성공으로 심프슨과 브룩하이머는 매우 부유해졌다. 그들은 종종 비슷한 옷을 입었고, 검은색을 상징적인 색으로 선택했다. 심프슨은 검은색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처음 세탁하기 전에만 입고 버릴 정도였다. 그는 가끔 운동과 태닝을 위해 캐년 랜치를 자주 찾았다. 심프슨은 성형 수술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3] 1988년부터 1994년 사이에 음경 확대 수술을 포함하여 10번의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다. 이 수술들은 결국 감염으로 이어져 여러 차례 복원 수술을 받았다.[23]
심프슨과 브룩하이머의 성공이 커지면서, 심프슨은 "파티광"으로서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는 "먹고 섹스하는 것 다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8] 그의 방탕한 생활 방식은 할리우드에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자료를 통해 기록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내내 "할리우드 코카인 파티" 서클의 단골이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저택에서 호화로운 밤샘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해졌다.[24] 할리우드 유명인과의 성적 만남에 대한 네 명의 매춘부 이야기를 다룬 책 ''You'll Never Make Love in This Town Again''의 한 챕터 전체가 그의 잦은 성관계 파티와 S&M 선호도를 다룬다.[25] 그는 또한 성욕을 높이기 위해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았다. 콜걸 알렉산드라 데이티그에 따르면, 심프슨은 자신의 영화 출연을 원하는 여배우들을 오디션에 참여시킨 뒤 성관계를 갖도록 설득하고, 이를 몰래 촬영하기도 했다.[23]
심프슨은 1970년대부터 코카인을 사용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용량이 늘어났다.[26] 과도한 지출(영화 제작과 사생활 모두에서)과 약물 사용으로 인한 변덕스러운 기분 변화는 1990년대 할리우드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14] 1994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심프슨은 자신의 평판을 해명하려 했고, 과거에 약물을 사용했지만 끊었다고 주장하며 당시 자신의 유일한 중독은 음식이라고 말했다.[4] 그러나 각본가 제임스 토백에 따르면, 심프슨의 약물 사용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이로 인해 데이비드 게펜과 제프리 카젠버그가 심프슨을 재활 시설에 보내기 위해 개입을 시도하기도 했다.[14]
심프슨은 전통적인 재활 시설 입원을 거부했다. 1995년, 그는 자신의 중독 치료를 돕기 위해 스티븐 아머먼이라는 의사를 고용했다. 아머먼은 과거 약물 남용 경력이 있었으며, 심프슨이 약물을 끊기 위해 고통스러운 금단 증상을 다른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고 믿었다. 아머먼은 집에서 심프슨이 복용하도록 모르핀을 포함한 여러 약물을 사용하는 "위험하고 독자적인" 해독 프로그램을 설계했다.[26][27] 1995년 8월, 아머먼은 심프슨의 거주지에서 사망했는데, 사인은 코카인, 발륨, 벤라팍신, 그리고 모르핀의 우발적인 과다 복용으로 밝혀졌다.[1][28]
심프슨의 심화되는 약물 사용과 작업 능력 저하에 실망한 브룩하이머는 1995년 12월 파트너십을 종료했다. 두 사람은 이미 제작 중이던 ''더 록''의 작업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29] 심프슨은 제작이 완료되기 전인 1996년 1월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마약 남용으로 인한 심장 마비였다. 브룩하이머는 마지막 공동 제작 작품이 된 ''더 록''(1996년)의 마지막에 "이 영화를 돈 심프슨의 추억에 바칩니다"라는 크레딧을 넣었다.[30]
2. 4. 죽음
심프슨은 1970년대부터 코카인을 사용해 왔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용량이 증가했다.[26] 199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그의 과도한 지출(영화 제작 및 사생활 모두)과 약물 사용으로 인한 변덕스러운 기분 변화가 잘 알려져 있었다.[14] 1994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평판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과거 약물 사용 사실을 인정했지만 이미 끊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유일한 중독은 음식이라고 말했다.[4] 그러나 각본가 제임스 토백에 따르면 심프슨의 약물 사용은 멈추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데이비드 게펜과 제프리 카젠버그가 개입하여 그를 재활 시설에 보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14]심프슨은 전통적인 재활 시설 입원을 거부하고, 1995년 자신의 중독 치료를 돕기 위해 스티븐 아머먼이라는 의사를 고용했다. 아머먼은 과거 약물 남용 경력이 있었으며, 심프슨이 약물을 끊기 위해 겪는 고통스러운 금단 증상을 다른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심프슨이 집에서 복용하도록 모르핀 등 여러 약물을 포함하는 "위험하고 비정통적인" 해독 프로그램을 설계했다.[26][27] 그러나 1995년 8월, 아머먼은 심프슨의 거주지에서 코카인, 발륨, 벤라팍신, 모르핀의 우발적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1][28]
심프슨의 약물 사용 심화와 작업 능력 저하에 실망한 오랜 파트너 제리 브룩하이머는 1995년 12월 그와의 파트너십을 종료했다. 다만 두 사람은 이미 제작 중이던 영화 ''더 록''의 작업은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29] 심프슨은 이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으며, 영화는 그의 죽음을 기리며 헌정되었다.[30]
1996년 1월 19일, 심프슨은 로스앤젤레스 벨에어 자택의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31] 처음에는 자연사로 알려졌으나, 부검 및 독성 검사 결과 약물 중독(코카인 및 처방약)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32] 사망 당시 그의 몸에서는 항우울제, 각성제, 진정제, 안정제 등 21가지의 다른 약물이 검출되었다.[23] 1996년 8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탐사 보도 기자 척 필립스는 심프슨이 15명의 다른 의사로부터 대량의 처방약을 받아왔으며, 경찰이 그의 침실 옷장에서 알파벳 순서로 정리된 2,200개의 처방약 알약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26][33]
저널리스트 찰스 플레밍이 1998년에 쓴 책에 따르면, 심프슨은 사망 당시 처방약에 한 달에 6만달러 이상을 지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플레밍은 심프슨을 "과급된 단순한 생물, 메스암페타민에 대한 이솝 우화"라고 묘사했다.[34][20]
3. 논란 및 비판
돈 심프슨은 그의 성공적인 영화 제작 경력 이면에 거친 성격과 동료 영화인들에 대한 도발적인 발언, 자신의 업적을 부풀리는 경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19][8][22] 업계에서는 그의 과장을 걸러 듣기 위해 소위 "돈 심프슨 할인 계수"(DSDF)라는 말이 사용될 정도였다.[8] 그는 제작자로서 "우리의 의무는 돈을 버는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히며 노골적인 상업주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20]
또한 그는 과시적인 소비와 사치스러운 생활,[3][21] 여러 차례의 성형 수술 의혹으로도 논란이 되었다.[23] 특히 그의 방탕한 사생활, 약물 남용, 여성 편력 및 성 추문은 할리우드 내외에서 끊임없는 논란거리였다.[24][25][23]
3. 1. 과도한 상업주의
돈 심프슨은 제작자로서 "우리의 의무는 돈을 버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며 노골적인 상업주의 성향을 드러냈다.[20] 그의 거친 성격과 도발적인 발언, 의문스러운 주장 역시 잘 알려져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대해 "똑똑한 유대인인데, 저렇게 하얀 빵처럼 밋밋하다니 놀랍다"고 말했으며,[19] 데이비드 린치를 ''듄'' 감독으로 추천한 사람을 비난하기도 했다.[8] 또한 1979년 스튜디오 회의에서는 셸리 듀발의 외모를 언급하며 "글쎄, 나는 그녀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녀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면, 그녀는 영화에 출연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뽀빠이''의 올리브 오일 역 캐스팅에 반대한 일화는 논란이 되었다.[22]그는 자신이 마이클 만을 발굴하고 데브라 윙거의 경력을 시작시켰으며, 리처드 기어를 ''아메리칸 지골로''에 캐스팅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이클 아이즈너가 부인했음에도 ''비벌리 힐스 캅''의 컨셉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8] 업계 동료들은 그의 과장을 걸러 듣기 위해 제프 카젠버그가 만든 "돈 심프슨 할인 계수"(DSDF)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였다.[8]
영화의 성공으로 심프슨과 브룩하이머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종종 비슷한 옷을 입었으며, 검은색을 상징적인 색으로 삼았다. 심프슨은 검은색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한 번만 입고 버릴 정도로 과시적인 소비를 하기도 했다.[3] 그는 운동과 태닝을 위해 캐년 랜치를 자주 찾았고,[21]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제공한 특별 장비로 매일 운동했다.[21] 성형 수술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3] 1988년부터 1994년 사이에 음경 확대 수술을 포함해 10번의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으며, 이 수술들은 감염으로 이어져 여러 차례 복원 수술을 받아야 했다.[23]
성공과 함께 심프슨의 "파티광"으로서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는 "먹고 섹스하는 것 다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8] 그의 방탕한 생활 방식은 할리우드에 널리 알려졌는데, 1970년대와 80년대 내내 "할리우드 코카인 파티"의 단골이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저택에서 호화로운 밤샘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했다.[24] 할리우드 유명인과의 성적 만남을 다룬 책 ''You'll Never Make Love in This Town Again''의 한 챕터 전체가 그의 잦은 성관계 파티와 S&M 선호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25] 그는 성욕 증진을 위해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았으며, 콜걸 알렉산드라 데이티그에 따르면 영화 출연을 원하는 여배우들을 오디션 후 성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고 이를 몰래 촬영했다는 주장도 있다.[23]
3. 2. 여성 편력 및 성 추문
심프슨은 결혼하지 않았다.[8]로버트 알트만 감독에 따르면, 심프슨은 1979년 스튜디오 임원 회의에서 셸리 듀발을 뽀빠이의 올리브 오일 역으로 캐스팅하는 것에 반대하며 "글쎄, 나는 그녀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녀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면, 그녀는 영화에 출연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22]
영화의 성공과 함께 심프슨은 "파티광"으로서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는 "먹고 섹스하는 것 다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8] 그의 방탕한 생활 방식은 할리우드 내에서 잘 알려져 있었으며, 여러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소위 "할리우드 코카인 파티"의 단골이었고, 말년에는 자신의 저택에서 호화로운 밤샘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했다.[24]
할리우드 유명인사와의 성적 만남을 다룬 책 ''You'll Never Make Love in This Town Again''의 한 챕터 전체는 심프슨의 잦은 성관계 파티와 S&M 성향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25] 그는 또한 성욕 증진을 위해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기도 했다. 콜걸 알렉산드라 데이티그는 심프슨이 자신의 영화 오디션에 참여한 여배우들에게 성관계를 갖도록 설득한 뒤, 이를 몰래 촬영했다고 주장했다.[23]
심프슨은 성형 수술 사실을 부인했지만,[3] 1988년부터 1994년 사이에 음경 확대 수술을 포함하여 10차례의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보도가 있다. 이 수술들은 이후 감염으로 이어져 여러 차례 복원 수술을 받아야 했다.[23]
4. 작품 목록
; 프로듀서로서
연도 | 영화 | 크레딧 | 비고 |
---|---|---|---|
1983 | 플래시댄스 | 프로듀서 | |
1984 | 비벌리 힐스 캅 | 프로듀서 | |
하트 도둑 | 프로듀서 | ||
1986 | 탑건 | 프로듀서 | |
1987 | 비버리 힐스 캅 2 | 프로듀서 | |
1990 | 폭풍의 질주 | 프로듀서 | |
1994 | 더 레프 | 제작 총괄 | |
1995 | 나쁜 녀석들 | 프로듀서 | |
크림슨 타이드 | 프로듀서 | ||
위험한 아이들 | 프로듀서 | 제작자로서 마지막 영화 | |
1996 | 더 록 | 프로듀서 | 사후 개봉 |
; 배우로서
연도 | 영화 | 역할 |
---|---|---|
1976 | 캐논볼 | 지방 검사 보조 |
1990 | 폭풍의 질주 | 알도 베네데티 |
; 작가로서
연도 | 영화 | 비고 |
---|---|---|
1975 | 알로하, 바비 앤 로즈 | 크레딧 없음 |
1976 | 캐논볼 |
; TV 시리즈
연도 | 제목 | 참여 |
---|---|---|
1996 | 데인저러스 마인즈 | 책임 프로듀서 |
4. 1. 사후 작품
연도 | 제목 | 크레딧 |
---|---|---|
2003 | 나쁜 녀석들 2 | 돈 심프슨/제리 브룩하이머 필름스 |
2020 | 나쁜 녀석들: 포에버 | 돈 심프슨/제리 브룩하이머 필름스 |
2022 | 탑건: 매버릭 | 돈 심프슨/제리 브룩하이머 필름스 |
2024 | 나쁜 녀석들: 라이드 오어 다이 | 돈 심프슨/제리 브룩하이머 필름스 |
2024 | 비버리 힐스 캅: 액셀 F | 돈 심프슨/제리 브룩하이머 필름스 |
5. 수상 및 후보
1980년대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동료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함께 만든 영화 『플래시댄스』, 『비버리힐스 캅』, 『탑건』 등이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 영화들의 막대한 흥행 수입 덕분에, 심프슨과 브룩하이머는 1985년과 1988년 두 차례에 걸쳐 전미 극장 경영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Theater Owners)로부터 '올해의 프로듀서'로 선정되었다.
또한, 그들이 제작한 영화들은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상 후보로 여러 차례 지명되었다. 영화 사운드트랙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조르지오 모로더나 케니 로긴스 같은 유명 뮤지션들이 참여했으며, 1990년대에는 힙합 음악을 활용하는 등 당시 유행하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그래미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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